맛과 멋

김해주

한 2년 전쯤엔가 구민자 작가에게서 이 작업에 대한 구상을 처음 들은 것 같다. 식품 포장지의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과 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요리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유명 포장재의 겉면에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하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의 전시 형태로서의 식당을 구상했다. 그 과정으로 요리 학원을 다니며 한식 요리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원 수강을 비롯한 일련의 준비와 연구, 그리고 전시로의 실현까지가 모두 이 작업을 구성하는 챕터들로, 이 전시까지 오는 데만 2년이 꼬박 걸렸다. 작가는 이미 2011년 뉴욕에 체류할 때부터 이 작업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그곳의 시장에서 처음 보는 식재료들을 접하게 된 것,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요리할까를 궁금해하다가 포장지에 있는 조리 예시 이미지들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음식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연계되어 있다. 맛보기는 타 문화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직접적 경험이다. 그러나 작가가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뉴욕의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한국의 슈퍼마켓에 널려 있는 라면, 햇반, 간장, 국수, 레토르트 카레 등과 같은 간편 식품들의 포장에 있는 조리 예였다. 작가는 그 음식의 포장들을 자세히 보면서 익숙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그 낯섦을 추적하면서 조리 예를 그대로 재현해 보는 다른 문화적 체험을 시도하게 된다.
요리 수업을 통해 기본 기술을 익히는 한편, 작가는 마트에서 흔히 보는 식품들 중 눈에 띄는 것들로 메뉴를 정하고 그 식품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전시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식품 시장의 변천에 대한 긴 연보가 작성되었다. 이 중에서 많이 팔린 상품들, 그 이미지가 인지된 포장재들, 그리고 우리의 식탁 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품들을 재현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카레는 최초의 레토르트 식품이고, 김은 1980년대 대기업이 이 식품 사업에 진출하면서 형태가 규격화된 역사가 있다. 그때 작은 회사들이 대기업 진출을 막아달라는 청원서를 올린 일이 있다고 한다. 국수 역시 군소 국수회사의 제품들이 난립하던 것을 모 회사가 흡수한 일이 있었다. 국수와 세트인 국수장국은 멸치나 가쓰오부시 맛이라는 게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햇반은 늘 집에서 직접 조리하는 대표적인 음식이 상품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식탁 문화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간장의 조리 예로는 두부조림이, 김의 조리 예로는 김밥이, 스팸의 조리 예로는 스페인풍의 카나페가 올라와 있었다. 라면은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그 패키지가 바뀌면서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되었다. 하나는 흰 그릇, 다른 하나는 검은 그릇에 담겼고, 두 그림의 고명이 놓인 위치도 조금 다르다. 대상이 된 음식을 결정한 후에는 그 구체적인 배열을 연구했다. 그릇의 비율에 맞춰 카레 속 감자와 당근의 크기를 계산했고, 부침가루 조리 예의 전을 똑같이 만들기 위해 철공소에서 틀을 주문하기도 했다. 각각의 그릇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거의 똑같은 것을 주문 제작했고, 그릇 옆에 장식으로 놓일 나뭇잎들도 유사한 것으로 찾아내었다. 이 아홉 가지 메뉴 하나하나의 요리들을 만들어 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감자는 대략 여섯 가지 방법으로 모서리를 다듬으며 개별적인 모양을 만들어야 하고, 쇠고기 역시 바닥에 닿은 면을 고려해 위의 모양을 다듬어야 한다. 포장지에 표시된 개별 재료의 원산지도 고려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예시와 똑같은 색깔을 내기 위해 어떤 양념들을 어떤 비율로 섞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시연된 조리 예들은 절반은 작품처럼, 절반은 식당의 메뉴판처럼 전시장 벽에 설치되었다. 반듯하고 먹음직스러운 모습을 한 패키지의 사진이 전시장의 사진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리고 예약을 통해 전시 기간 중 네 차례 직접 재연 과정을 보고, 요리를 먹어볼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일반적인 요리에서는 볼 수 없는 노력과 시간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식품의 패키지에 있는 음식은 당연히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보기 위한 음식, 정확히는 팔리기 위한 음식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공식조차 성립되지 않는 그림의 떡이다. 실제 패키지 사진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들은 대부분 먹을 수 없는 맛과 질감을 가졌다. 형태를 디자인하고, 먹음직스럽게 물감을 덧입힌 디자인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요리는 오히려 공예적, 혹은 미술적 수련과 맞닿아 있다. 예술의 역사 안에서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재현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데아를, 신의 존재를, 절대적 아름다움과 세밀한 현실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구민자 작가는 음식 패키지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실재하기 어려운 규범에 대해 재현하려는 지난한 재현의 전통에 대한 하나의 우화로 볼 수 있다. 미술이 가상으로 실재를 묘사해 왔다면, 작가는 이미지의 가상성을 실재하는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식품의 레서피를 따라간다 해도 그 조리 예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속임수 아닌 속임수이다. 결국은 예시라는 이름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끝까지 따라가 본다. 어떤 강제성도 없는, 단지 스스로에게 철저할 뿐인 이러한 작업의 과정에 대해 ‘왜 하는가?’보다는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질문하는 쪽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면서 핀셋으로 밥알의 각도를 바로 잡는 행위가 이미지의 허상과 그 배경에 있는 실제를 드러내는 폭로의 과정에만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작가가 이전의 작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속도의 문제와 노동의 경험을 통한 수행의 연장성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한정 없는 일’에 무한의 시간을 쓸 수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제가 같지 않다는 관습적 이해를 받아들이자면 카레는 3분이면 해결되고, 햇반은 1분 30초 안에 결론이 난다. 받아들이면 어떤 실망도 없지만, 이것을 질문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세 시간으로, 여섯 시간으로 연장된다. 심지어 2년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수도 있다. 인스턴트의 시간은 한없이 긴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달리 사용하는 것은 나를 눈뜨게 하고, 걷게 하고, 일하게 하고, 잠들게 하는 외부적 요구와 조건에 대해 의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규범, 인증, 증명의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연결된다. 구민자 작가의 요리 과정과 그 끈질긴 시간의 사용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신없는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평균적인 속도가 자동차에 가깝다면, 평범한 사람에게 부착된 엔진은 겨우 자전거 정도이고, 구민자 작가 작업의 출력 엔진은 이보다 더 느린 것 같다. 그렇다고 ‘느린 속도가 평온하고 안정된 세계만을 그려내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럴리가. 속도감의 상실은 반대로 익숙한 세계를 의심할 수 있는 감각을 되살려 준다. 배경판이 점점 속도를 늦추며 결국 정지하는 그림자 인형극처럼, 달리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그 틀의 그림일 뿐이다. 소설을 읽기만 하는 대신 그것을 오랜 시간 필사하여 남기거나(「서른」, 2006), 남들처럼 뛰어가는 대신 이틀에 나눠 걷는 것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등(「42.195」, 2006) 작가는 다른 속도감을 표시해 왔다. 몰로이처럼 오른쪽 주머니의 돌을 빼어, 왼쪽 주머니에 넣는 일의 반복이 지속된다. 속도에 대한 질문은 제도에 대한 질문이고 이것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가?’라는 강한 항의를 내포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구민자 작가의 작업이 어떤 역할을 임시적으로 맡거나 혹은 타인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대신, 그 스스로가 긴 시간 역할을 감당하는 수행적 작업들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긴 지속의 과정 속에서 전시의 순간은 한 단면에 불과하다. 특히나 사회 속에 놓인 개인의 삶의 조건에 대한 당면한 질문에서 작가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기보다 직접 그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질문의 강도를 높여 갔다. 2011년 선감도의 경기창작센터에서 선보인 「겨우살이」라는 작업은 레지던시가 위치한 선감도 주민들의 일손을 돕고 그 품앗이로 배추와 양념을 얻어 김장을 한 것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온전히 투입된 노동이자 작업이었다. 2008년 대만에서의 「직업의 세계」라는 작업은 직접 구인광고를 만들어 직업을 구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삼고 도큐멘트하고, 실제 노동했다. 미술관의 행정이 예술가들에게 공무원적 업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대신, 「예술가-공무원 임용 규정을 마련하기 위한 공청회」를 열어보기도 하고(2013), 자신의 작품, 옷, 수집품 등 모든 것을 모아 판매대에 내어놓는 「구민자 아트페어」(2013)를 실행하기도 하는 등, 작가는 직접 구조를 설계하고 그 안에서 ‘-되기’를 실행할 뿐, 단순한 방관자나 연구 관찰자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 이렇게 경험하고 시간을 견디면서 구축된 데이터는 사건들이 만들어지는 정확한 과정을 담담하게 노출시킨다.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작업들로, 작가는 제도가 미리 정해 놓은 규칙이나, 효율성을 이유로 각각의 차별성을 무작위로 다듬어 버리는 관습에 대해 저항 아니, 반항한다. 꾸준히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들과 수행으로 만들어진 날렵하지는 않아도 둔탁함이 없는 형태, 그 단단한 겹의 형태들이 바로 이 정통의 맛과 멋이다.

P.S. 3분 카레와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노란 배경의 패키지로 유명한 한 식품회사는 익숙한 빨간 오뚜기 그림을 CI로 사용한다. “통통한 얼굴을 한 건강한 어린이의 입맛 다시는 표정”의 CI를 설명하는 홈페이지에는 달마대사의 초상과 그의 생애가 대신 올라와 있다. 오뚜기는 달마대사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 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오뚜기의 정신은 “1. 정적이 아니고 동적이다. 2. 외세에 굴하지 아니한다. 3.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4. 낭비를 하지 않는다. 5. 항상 단정하고 깔끔하다. 6.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이다.

맛과 멋

김해주

한 2년 전쯤엔가 구민자 작가에게서 이 작업에 대한 구상을 처음 들은 것 같다. 식품 포장지의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과 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요리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유명 포장재의 겉면에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하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의 전시 형태로서의 식당을 구상했다. 그 과정으로 요리 학원을 다니며 한식 요리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원 수강을 비롯한 일련의 준비와 연구, 그리고 전시로의 실현까지가 모두 이 작업을 구성하는 챕터들로, 이 전시까지 오는 데만 2년이 꼬박 걸렸다. 작가는 이미 2011년 뉴욕에 체류할 때부터 이 작업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그곳의 시장에서 처음 보는 식재료들을 접하게 된 것,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요리할까를 궁금해하다가 포장지에 있는 조리 예시 이미지들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음식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연계되어 있다. 맛보기는 타 문화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직접적 경험이다. 그러나 작가가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뉴욕의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한국의 슈퍼마켓에 널려 있는 라면, 햇반, 간장, 국수, 레토르트 카레 등과 같은 간편 식품들의 포장에 있는 조리 예였다. 작가는 그 음식의 포장들을 자세히 보면서 익숙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그 낯섦을 추적하면서 조리 예를 그대로 재현해 보는 다른 문화적 체험을 시도하게 된다.
요리 수업을 통해 기본 기술을 익히는 한편, 작가는 마트에서 흔히 보는 식품들 중 눈에 띄는 것들로 메뉴를 정하고 그 식품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전시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식품 시장의 변천에 대한 긴 연보가 작성되었다. 이 중에서 많이 팔린 상품들, 그 이미지가 인지된 포장재들, 그리고 우리의 식탁 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품들을 재현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카레는 최초의 레토르트 식품이고, 김은 1980년대 대기업이 이 식품 사업에 진출하면서 형태가 규격화된 역사가 있다. 그때 작은 회사들이 대기업 진출을 막아달라는 청원서를 올린 일이 있다고 한다. 국수 역시 군소 국수회사의 제품들이 난립하던 것을 모 회사가 흡수한 일이 있었다. 국수와 세트인 국수장국은 멸치나 가쓰오부시 맛이라는 게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햇반은 늘 집에서 직접 조리하는 대표적인 음식이 상품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식탁 문화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간장의 조리 예로는 두부조림이, 김의 조리 예로는 김밥이, 스팸의 조리 예로는 스페인풍의 카나페가 올라와 있었다. 라면은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그 패키지가 바뀌면서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되었다. 하나는 흰 그릇, 다른 하나는 검은 그릇에 담겼고, 두 그림의 고명이 놓인 위치도 조금 다르다. 대상이 된 음식을 결정한 후에는 그 구체적인 배열을 연구했다. 그릇의 비율에 맞춰 카레 속 감자와 당근의 크기를 계산했고, 부침가루 조리 예의 전을 똑같이 만들기 위해 철공소에서 틀을 주문하기도 했다. 각각의 그릇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거의 똑같은 것을 주문 제작했고, 그릇 옆에 장식으로 놓일 나뭇잎들도 유사한 것으로 찾아내었다. 이 아홉 가지 메뉴 하나하나의 요리들을 만들어 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감자는 대략 여섯 가지 방법으로 모서리를 다듬으며 개별적인 모양을 만들어야 하고, 쇠고기 역시 바닥에 닿은 면을 고려해 위의 모양을 다듬어야 한다. 포장지에 표시된 개별 재료의 원산지도 고려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예시와 똑같은 색깔을 내기 위해 어떤 양념들을 어떤 비율로 섞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시연된 조리 예들은 절반은 작품처럼, 절반은 식당의 메뉴판처럼 전시장 벽에 설치되었다. 반듯하고 먹음직스러운 모습을 한 패키지의 사진이 전시장의 사진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리고 예약을 통해 전시 기간 중 네 차례 직접 재연 과정을 보고, 요리를 먹어볼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일반적인 요리에서는 볼 수 없는 노력과 시간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식품의 패키지에 있는 음식은 당연히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보기 위한 음식, 정확히는 팔리기 위한 음식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공식조차 성립되지 않는 그림의 떡이다. 실제 패키지 사진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들은 대부분 먹을 수 없는 맛과 질감을 가졌다. 형태를 디자인하고, 먹음직스럽게 물감을 덧입힌 디자인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요리는 오히려 공예적, 혹은 미술적 수련과 맞닿아 있다. 예술의 역사 안에서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재현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데아를, 신의 존재를, 절대적 아름다움과 세밀한 현실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구민자 작가는 음식 패키지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실재하기 어려운 규범에 대해 재현하려는 지난한 재현의 전통에 대한 하나의 우화로 볼 수 있다. 미술이 가상으로 실재를 묘사해 왔다면, 작가는 이미지의 가상성을 실재하는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식품의 레서피를 따라간다 해도 그 조리 예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속임수 아닌 속임수이다. 결국은 예시라는 이름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끝까지 따라가 본다. 어떤 강제성도 없는, 단지 스스로에게 철저할 뿐인 이러한 작업의 과정에 대해 ‘왜 하는가?’보다는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질문하는 쪽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면서 핀셋으로 밥알의 각도를 바로 잡는 행위가 이미지의 허상과 그 배경에 있는 실제를 드러내는 폭로의 과정에만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작가가 이전의 작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속도의 문제와 노동의 경험을 통한 수행의 연장성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한정 없는 일’에 무한의 시간을 쓸 수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제가 같지 않다는 관습적 이해를 받아들이자면 카레는 3분이면 해결되고, 햇반은 1분 30초 안에 결론이 난다. 받아들이면 어떤 실망도 없지만, 이것을 질문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세 시간으로, 여섯 시간으로 연장된다. 심지어 2년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수도 있다. 인스턴트의 시간은 한없이 긴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달리 사용하는 것은 나를 눈뜨게 하고, 걷게 하고, 일하게 하고, 잠들게 하는 외부적 요구와 조건에 대해 의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규범, 인증, 증명의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연결된다. 구민자 작가의 요리 과정과 그 끈질긴 시간의 사용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신없는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평균적인 속도가 자동차에 가깝다면, 평범한 사람에게 부착된 엔진은 겨우 자전거 정도이고, 구민자 작가 작업의 출력 엔진은 이보다 더 느린 것 같다. 그렇다고 ‘느린 속도가 평온하고 안정된 세계만을 그려내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럴리가. 속도감의 상실은 반대로 익숙한 세계를 의심할 수 있는 감각을 되살려 준다. 배경판이 점점 속도를 늦추며 결국 정지하는 그림자 인형극처럼, 달리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그 틀의 그림일 뿐이다. 소설을 읽기만 하는 대신 그것을 오랜 시간 필사하여 남기거나(「서른」, 2006), 남들처럼 뛰어가는 대신 이틀에 나눠 걷는 것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등(「42.195」, 2006) 작가는 다른 속도감을 표시해 왔다. 몰로이처럼 오른쪽 주머니의 돌을 빼어, 왼쪽 주머니에 넣는 일의 반복이 지속된다. 속도에 대한 질문은 제도에 대한 질문이고 이것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가?’라는 강한 항의를 내포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구민자 작가의 작업이 어떤 역할을 임시적으로 맡거나 혹은 타인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대신, 그 스스로가 긴 시간 역할을 감당하는 수행적 작업들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긴 지속의 과정 속에서 전시의 순간은 한 단면에 불과하다. 특히나 사회 속에 놓인 개인의 삶의 조건에 대한 당면한 질문에서 작가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기보다 직접 그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질문의 강도를 높여 갔다. 2011년 선감도의 경기창작센터에서 선보인 「겨우살이」라는 작업은 레지던시가 위치한 선감도 주민들의 일손을 돕고 그 품앗이로 배추와 양념을 얻어 김장을 한 것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온전히 투입된 노동이자 작업이었다. 2008년 대만에서의 「직업의 세계」라는 작업은 직접 구인광고를 만들어 직업을 구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삼고 도큐멘트하고, 실제 노동했다. 미술관의 행정이 예술가들에게 공무원적 업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대신, 「예술가-공무원 임용 규정을 마련하기 위한 공청회」를 열어보기도 하고(2013), 자신의 작품, 옷, 수집품 등 모든 것을 모아 판매대에 내어놓는 「구민자 아트페어」(2013)를 실행하기도 하는 등, 작가는 직접 구조를 설계하고 그 안에서 ‘-되기’를 실행할 뿐, 단순한 방관자나 연구 관찰자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 이렇게 경험하고 시간을 견디면서 구축된 데이터는 사건들이 만들어지는 정확한 과정을 담담하게 노출시킨다.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작업들로, 작가는 제도가 미리 정해 놓은 규칙이나, 효율성을 이유로 각각의 차별성을 무작위로 다듬어 버리는 관습에 대해 저항 아니, 반항한다. 꾸준히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들과 수행으로 만들어진 날렵하지는 않아도 둔탁함이 없는 형태, 그 단단한 겹의 형태들이 바로 이 정통의 맛과 멋이다.

P.S. 3분 카레와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노란 배경의 패키지로 유명한 한 식품회사는 익숙한 빨간 오뚜기 그림을 CI로 사용한다. “통통한 얼굴을 한 건강한 어린이의 입맛 다시는 표정”의 CI를 설명하는 홈페이지에는 달마대사의 초상과 그의 생애가 대신 올라와 있다. 오뚜기는 달마대사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 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오뚜기의 정신은 “1. 정적이 아니고 동적이다. 2. 외세에 굴하지 아니한다. 3.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4. 낭비를 하지 않는다. 5. 항상 단정하고 깔끔하다. 6.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이다.